你请求的页面无法显示。
자본론 읽기 1 (백수론)
분류없음
2009/07/18 02:28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상호-직접관련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해관계가 없는 지식이란 환상이며, 지식이 권력적 관계를 창출하고, 권력적 관계가 지식을 창출한다고 했다. 이를 쉽게 표현하자면, 텍스트는 항상 텍스트의 외부적 조건의 산물이며 외부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텍스트를 읽을 때 그것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특정 관계의 산물로 보는 것, 요새 내가 <<자본론>>을 공부하며 염두하게 되는 점이다.
보통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최대 업적을, 그가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잉여가치의 착취를 '과학'적 규명한 것에서 본다. 그래서 모든 가치는 노동에서 나온다는 노동가치설을 신봉한다. 그것에 대한 비판을 노동자 혹은 노동운동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보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한 입장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방향은 정당한 임금 분배를 위한 투쟁이다. 물론 사람은 당장 밥 벌이할 수 없다면 살 수 없고, 정당한 몫의 요구는 당연하다. 그러나 문제는 자본에 대한 저항이 보다 많은 임금의 분배로 대표되는 경제적 투쟁에 우선순위를 둔다면 자본주의를 지양할 길은 영영 요원해진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타인을 자신이 필요한 생활재를 얻는 수단으로써만 관계하게 만든다.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분업사회의 아름다움이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자본주의에 고유한 물신주의(사람의 관계가 물건의 관계로 표상되)는 모두가 공정한 임금을 받는 사회가 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가치론을 중시 하는 배경에는, 노동운동이라는 견고한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노동운동이 갖는 중심성, 물질적 힘 등이 섣불리 노동가치론을 건들지 못하게 한다. 임금노동자에게 모든 가치는 노동에서 나온다는 선언만큼 자신의 존재 근거에 자부심을 주는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백수의 입장에서 보면 다르다. 백수에게 노동가치론의 공리는 취업되지 못한 자는 잉여인간이라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백수들을 위해 노동운동가들은 만인의 완전고용 보장이라는 구호를 내건다. 하지만 자신의 백수됨을 사랑하는 백수에게는 이또한 무서운 선언일 뿐이다. 임금 노동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소외자가 아닐까. 마치 등가물을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수 있는 상품의 비애처럼 말이다. 백수는 자본제적 노동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기를 거부하는 존재이다. 내가 고진의 자본론 해석에 끌리는 이유는 사실 이러한 현실 조건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노동가치론에 기반한 기존 사회주의 운동'에 (자본가에 정당한 분배를 요구하는) 소극적 지양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사회주의는 (잉여가치 착취라는) 자본제의 모순을 국가를 통해 전복적으로 타파하고자 한 시도의 결과이다. 그들은 자유로운 상품교환이 아닌, 국가에 의한 계획적 생산과 분배를 통해 상호협동적인 이상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이 초래한 결과는 화폐의 물신성에 버금갈, 아니 그것을 능가하는지도 모를 폐해를 낳았다. 고진이 화폐를 양기(보존하면서, 폐기)하려는 것은 이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에 의하면 시장경제는 여러가지 폐해를 낳았지만, 또한 전통적인 공동체에서는 불가능했던 자유를 주었다. 그렇기에 섣불리 자본주의를 폐기하려 하면 더욱 안좋은 사회를 낳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자본주의를 지양할 사회를 꿈꾼다는 것이 그의 이율배반이긴 하지만)
상품교환은 (필연적으로) 화폐를 낳는다. 또한 가치의 본질을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노동으로 환원된다. 고진식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상품교환이 만든 초월론적 가상이다. 노동이 아니라 놀이로 살아가는 사회, 자유롭게 교환하지만 서로를 수단으로만 보지 않는 사회. 그것은 노동가치론만 따라서는 닿을 수 없다. 이처럼 백수라는 외부적 조건은 '자본론'을 새롭게 읽게 만든다.
보통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최대 업적을, 그가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잉여가치의 착취를 '과학'적 규명한 것에서 본다. 그래서 모든 가치는 노동에서 나온다는 노동가치설을 신봉한다. 그것에 대한 비판을 노동자 혹은 노동운동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보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한 입장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방향은 정당한 임금 분배를 위한 투쟁이다. 물론 사람은 당장 밥 벌이할 수 없다면 살 수 없고, 정당한 몫의 요구는 당연하다. 그러나 문제는 자본에 대한 저항이 보다 많은 임금의 분배로 대표되는 경제적 투쟁에 우선순위를 둔다면 자본주의를 지양할 길은 영영 요원해진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타인을 자신이 필요한 생활재를 얻는 수단으로써만 관계하게 만든다.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분업사회의 아름다움이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자본주의에 고유한 물신주의(사람의 관계가 물건의 관계로 표상되)는 모두가 공정한 임금을 받는 사회가 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가치론을 중시 하는 배경에는, 노동운동이라는 견고한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노동운동이 갖는 중심성, 물질적 힘 등이 섣불리 노동가치론을 건들지 못하게 한다. 임금노동자에게 모든 가치는 노동에서 나온다는 선언만큼 자신의 존재 근거에 자부심을 주는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백수의 입장에서 보면 다르다. 백수에게 노동가치론의 공리는 취업되지 못한 자는 잉여인간이라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백수들을 위해 노동운동가들은 만인의 완전고용 보장이라는 구호를 내건다. 하지만 자신의 백수됨을 사랑하는 백수에게는 이또한 무서운 선언일 뿐이다. 임금 노동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소외자가 아닐까. 마치 등가물을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수 있는 상품의 비애처럼 말이다. 백수는 자본제적 노동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기를 거부하는 존재이다. 내가 고진의 자본론 해석에 끌리는 이유는 사실 이러한 현실 조건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노동가치론에 기반한 기존 사회주의 운동'에 (자본가에 정당한 분배를 요구하는) 소극적 지양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사회주의는 (잉여가치 착취라는) 자본제의 모순을 국가를 통해 전복적으로 타파하고자 한 시도의 결과이다. 그들은 자유로운 상품교환이 아닌, 국가에 의한 계획적 생산과 분배를 통해 상호협동적인 이상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이 초래한 결과는 화폐의 물신성에 버금갈, 아니 그것을 능가하는지도 모를 폐해를 낳았다. 고진이 화폐를 양기(보존하면서, 폐기)하려는 것은 이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에 의하면 시장경제는 여러가지 폐해를 낳았지만, 또한 전통적인 공동체에서는 불가능했던 자유를 주었다. 그렇기에 섣불리 자본주의를 폐기하려 하면 더욱 안좋은 사회를 낳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자본주의를 지양할 사회를 꿈꾼다는 것이 그의 이율배반이긴 하지만)
상품교환은 (필연적으로) 화폐를 낳는다. 또한 가치의 본질을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노동으로 환원된다. 고진식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상품교환이 만든 초월론적 가상이다. 노동이 아니라 놀이로 살아가는 사회, 자유롭게 교환하지만 서로를 수단으로만 보지 않는 사회. 그것은 노동가치론만 따라서는 닿을 수 없다. 이처럼 백수라는 외부적 조건은 '자본론'을 새롭게 읽게 만든다.









